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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7. 7世 〉12. <부정공>봉렬대부참례도찰방공휘지륜묘갈명(奉列大夫參禮道察訪公諱智崙墓碣銘)
1. 문헌 목록 〉7. 7世 〉14. <부정공>이로재기(履露齋記)휘지륜(諱智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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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부정공>찰방공휘지륜묘지(察訪公諱智崙墓誌)
察訪公諱智崙墓誌 昇平之雙巖書堂洞有枕艮而封者故察訪趙公諱智崙之藏夫人河氏同塋諸趙氏相與謀曰吾祖之墓古宜有誌而今無徵宜爲銘以徵後且埋焉熟奇君有泳萬盍往圖諸字萬竊惟公天倫篤厚民懿好德樵牧無知猶指點相吿勿拜其墓木是以歷年五百屢經兵火斧堂無恙區區爲文何足爲輕重生而岐嶷良知好學經子百家誦言如流貫通浹洽成梅竹見與語謂大器薦授寝郎尋出參禮郵官官不稱德而猶恭其職郵民去思勒石高尚其志泊於進取足不及權貴門雅言曰貌人而心不若吾生憎結此人而得半級吾不爲也與其祿養曷若吾躬稼而給滫瀡退與伯仲及季志養極備老慈八耋無恙兄弟亦無故式好無猶洵稀世眞樂母終天年盡其情文風雨寒暑不以闕上塚服闋月猶二省朔及望也謙川之上結小亭長枕大衾埍唱箎和不知世間有榮辱得喪者相好之名果實際也湛樂之餘敎子課孫鄉里後進來者不拒幼而不敎父兄之過長不勤學自棄其身公所恆言而日間必有課程子史自止不敢違越軆驗實踐即其究竟服食節儉亦有恆規見善如已出見不善如躬懷盖其天性然也生正統丙辰卒弘治癸亥趙氏其先玉川人高麗大將軍璋㝡著高祖佺玉川府院君曾祖元吉參定策勳亦封君麗社屋遯淳昌罔僕白靖後 贈諡忠獻建祠爼杜祖瑜號虔谷官副正獨喪三年菀爲民表我朝徵不起遵海居順天後忠孝表宅考斯文司正 贈吏曹參議妣靑山鄭氏參軍尚周其考河氏籍晋州剛莊公漢女一男穩直長孫淑珪察訪琦承義副尉淑璟忠順衛淑瑊將仕郎淑瓘縣監孫女適宋校理世琳庶適沈煥至曾玄文行克家者輩出吾先子嘗記相好亭所謂創垂深厚者盖指此也公當我朝初運爲循環氣數陶鑄出來孝友文行卓乎拔萃使其用行則足以輔佐孝理光膺一治而任其舍藏獨善其身雖若爲世路慨其所以矜式鄉坊者足範百世世自有公評膚末後生豈敢贅疣於其他也將命者瑄錫泳寶忠材也銘曰祖有忠獻麗季罔僕齊名圃牧副正繼起居喪超俗三年之獨之忠之孝源深根厚是宜有後式生賢孫卓卓孝友三綱爲首謙川之上相好有亭百世風聲雙巖有阡苑彼佳城我昭其銘 幸州 奇宇萬 撰 參奉松沙 찰방공휘지륜묘지(察訪公諱智崙墓誌) 승평의 쌍암(雙巖) 서당동(書堂洞) 간좌(艮坐)에 있는 무덤은 고(故) 찰방 조공 휘 지륜(智崙)이 잠든 곳이다. 부인 하씨도 동영(同塋)인데 여러 조씨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 조상의 무덤에 옛날에는 의당 묘지가 있었을 터인데 지금은 징험할 바가 없으니 묘지명을 써서 후세에 증거하도록 묻어야 한다.』 하고는 나우만(宇萬)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공은 천륜이 독실하여 백성들이 그 덕을 생각하여 비록 나무하는 무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서로 공의 무덤을 가리키면서 묘의 나무를 베지 말라고 알려 주었다. 그래서 五백년동안 여러 차례 전쟁을 겪으면서도 아무 탈 없이 보존되었으니, 구구한 비문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기국이 높고 양지(良知)의 학문을 좋아하여 경사자집(經史子集)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글을 물 흐르듯 외어 흡족하게 관통하였다. 그래서 매죽헌 성삼문 공이 큰 그릇이라 여겨 참봉으로 천거하였다. 얼마 후에 삼례도찰방(參禮道察訪)으로 나가니, 벼슬이 공의 덕에 맞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직분을 공손히 수행하였다. 후에 역(驛)에 있는 사람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공의 고상한 뜻을 기렸다. 출세를 하기 위해 권문세도가의 집 문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는데 평소 말하기를, “겉은 사람인데 속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나는 평생 미워한다. 그런 사람을 사귀어 약간의 도움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하지 않는다. 녹봉을 받아 부모를 봉양하는 것과 내 스스로 농사를 지어 하는 것 어느 쪽이 낫겠는가?” 하고는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백씨·중씨 및 계씨와 함께 부모 뜻 받들기를 극진히 하여 늙은 어머니께서 八十이 되도록 부양하고, 형제 역시 아무 일이 없다. 더 없는 즐거움을 누리었다. 어머니께서 천수(天壽)를 다하자 상례를 극진히 하여 비바람과 추위. 더위를 무릅쓰고 무덤에 가기를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복을 벗고도 한 달에 초하루와 보름에는 꼭꼭 찾아갔다. 또 겸천 위에 작은 정자를 짓고는 큰 베개와 큰 이불을 만들어 四兄弟가 함께 자면서 화기애애하게 지내면서 세상의 부귀영화에 대하여 마음을 쓰지 않았다. 이렇게 즐기는 여가에 자손을 가르치고 향리의 후진들이 와서 배우기를 청하면 거절 하지 않았다. 『어린 아들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부모의 과실이요, 자라서 학문에 힘쓰지 않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버린 것이다.』 라는 말을 항상 하였다. 날마다 반드시 공부의 과정을 두었는데 제자(諸子)와 역사책은 못 보게 하여 조금도 어기지 못하고 체험하면서 실천하고 끝까지 연구하게 하였다. 의복과 음식 역시 근검하여 법도가 있었고, 남의 착한 일을 보면 자기의 일처럼 좋아하고 착하지 못한 일을 보면 자기의 잘못처럼 여겼으니, 이는 모두 천성에서 우러난 것이다. 공은 정통(正統) 병진년(一四三六)에 출생하여 홍치(弘治) 계해년(一五○ 三)에 졸하였다. 조씨의 선대는 옥천인으로 고려 대장군 장(璋)이 가장 드러났고, 고조 전(佺)은 옥천부원군이며, 증조 원길(元吉)은 정책 공신에 참여하였는데 고려가 망하자 순창으로 은거하여 절의를 세워 후에 충헌이란 시호를 받고 사당을 세워 제사지낸다. 조(祖) 유(瑜)는 호가 건곡이며 벼슬은 부정(副正)으로 홀로 삼년상을 치러 백성들 의 모범이 되었다. 李朝에서 벼슬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바닷가 순천에서 살았는데 후에 그 충효를 표창하였다. 고(考) 사문(斯文)은 사정(司正)으로 이조참의에 추증되 었고, 비 청산정씨(靑山鄭氏)는 참군(參軍) 상주(尚周)의 딸이다. 부인 하씨(河氏)는 본관이 진주인데 강장공(剛莊公) 하한(河漢)의 딸이다. 외아들 온(穩)은 벼슬이 직장(直長)이며 손자 숙규는 찰방, 숙기는 승의부위(承義副 尉), 숙경은 충순위, 숙함은 장사랑, 숙관은 현감이다. 손녀는 교리(校理) 송세림(宋世 琳)에게 출가하고, 서녀는 심환(沈煥)에게 출가하였다. 증손 현손까지 학문과 행실로 집안을 빛낸 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나의 선자(先子) 노사(蘆沙) 선생께서 일찍이 상호정 기문을 지으면서 ‘후손에게 후한 것을 남겨 주었다.」고 한 것은 이런 것을 가리킨 것이다. 공은 우리 조선 초기의 운수가 순환하는 좋은 때를 당하여 효우와 문행(文行)이 탁월하게 뛰어났으니, 공으로 하여금 세상에 행하도록 했으면 족히 효로 다스리는 정치를 보좌하여 응당 빛나는 치적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냥 숨도록 내버려 두어 자신만을 선하게 하였으니 세상을 위하여 개탄할 바이지만, 그가 향리에서 교화를 베풀어 백세토록 모범을 남긴 것은 세상의 공론이 있을 것인데 어찌 후생이 감히 이렇다 저렇다 다른 말을 덧붙이겠는가. 나에게 명을 청한 이는 선석(瑄錫)·영보(泳寶)·충재(忠材)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할아버지 충헌공은 祖有忠獻 고려말 절의 세워 麗季罔僕 그 이름 포은 목은과 같네 齊名圃牧 부정공이 뒤를 이어 副正繼起 상례를 세속보다 많이 居喪超俗 삼년상 치루었네. 三年之獨 그 충성 그 효도 之忠之孝 뿌리와 근원 깊고 멀어 源深根厚 의당 이 뒤에도是宜有後 어진 자손에게 모범되어 式生賢孫 그 탁월한 효행과 우애 卓卓孝友 삼강의 으뜸이네 三綱爲首 겸천의 위에 謙川之上 상호정이 있어 相好有亭 백세의 풍성이네 百世風聲 쌍암의 무덤 雙巖有阡 저 아름다운 성에 苑彼佳城 나는 명을 밝히네 我昭其銘 행주(幸州) 기우만(奇字萬) 지음 벼슬은 참봉이요 호는 송사(松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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